본문으로 이동

PAOK FC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본 클럽의 모태 종합클럽에 대해서는 PAOK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PAOK
전체 명칭Πανθεσσαλονίκειος Αθλητικός Όμιλος
Κωνσταντινουπολιτών
별칭Δικέφαλος του βορρά (북쪽 쌍두독수리)
Άσπρομαβροι (흑백)
국가 그리스
대륙UEFA
리그수페르리가 엘라다
경기장PAOK 스타디움
수용 인원29,000[1]
창단1926년 4월 20일(100년 전)(1926년 4월 20일)
소유주러시아 이반 사비디스[2]
감독알레시오 리시
2025-263위
웹사이트www.paokfc.gr
홈
원정
서드

판테살로니케이오스 아틀리티코스 오밀로스 콘스탄티누폴리톤(그리스어: Πανθεσσαλονίκειος Αθλητικός Όμιλος Κωνσταντινουπολιτών, "콘스탄티노폴리스인들의 범테살로니키 체육 클럽")은 흔히 파오크(그리스어: ΠΑΟΚ ˈpa.ok[*])로 알려진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의 테살로니키를 연고로 하는 그리스의 축구 클럽이다.

PAOK는 현재 1부 리그인 수페르리가 엘라다에 속해 있으며 이 리그에서 세 차례 우승을 거두었다. 클럽의 홈구장은 PAOK 스타디움이다.

역사

[편집]

창단 및 초창기

[편집]

PAOK FC는 PAOK 스포츠 클럽의 가장 오래된 클럽으로, 1877년에 이스탄불 페라의 그리스계 주민들에 의해 창단된 에르미스(그리스어: Ερμής)의 후신이다.[3]

1926년 PAOK 선수단.
1937년 선수단.

그러나, 소아시아 사태로 인해 클럽의 활동이 갑자기 끝났고, 대부분의 선수들이 그리스로 이주하게 되었다. 클럽의 잔재는 남은 주민들로 구성된 클럽 (나중에 폴리타키아 (πολιτακια) 라고 불림) 이었다. 피난민들은 테살로니키에 정착한 후 PAOK를 설립하였다. 새 클럽의 초창기 (1925년) 이름은 ΑΕΚ 테살로니키 (테살로니키의 콘스탄티노폴리스인들) 이었고, 1년 후, PAOK가 더 개방적이고 큰 클럽이 되기 위한 의지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헤르메스의 후신으로 존재하는 다른 클럽들로는 베욜루와 AEK가 있다.

클럽의 선언은 1926년 4월 20일, 테살로니키 1심 법원에 의해 수락 (822조) 되었다. 1926년에 코스타스 코엠초풀로스 (페라 클럽의 회장) 가 도입한 PAOK의 첫 엠블럼은 네잎 클로버와 말굽이었다. 잎사귀는 녹색으로, 각 잎사귀에 P, A, O, K로 적혀 있었다.

클럽의 창립을 함께했던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T. 트리안타필리디스, (초대 회장) 하산 쾨프륄뤼, (2대 회장) A. 앙겔로풀로스, (3대 회장) A. 아타나시아디스, K. 아나그노스티디스, M. 벤투렐리스, A. 디미트리아디스, D. 디미트리아디스, N. 줌불리디스, M. 테오도시아디스, T. 이오아키모풀로스, P. 칼파크초글루, T. 카르참베키스, D. 코엠초풀로스, K. 코엠초풀로스, P. 콘토풀로스, K. 크리티코스, M. 콘스탄티니디스, P. 말레츠카스, I. 니콜라이디스, L. 파파도풀로스, F. 가모스피토스, F. 사만초풀로스, T. 출카스, M. 출카스, S. 트리안타필리디스.

클럽의 설립으로부터 두달간 선수단을 준비한 후, 테살로니키의 타팀과 경쟁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클럽의 첫 상대는 이라클리스로 7월 26일 치른 이 경기에서 2-1로 이겼다. 2주 후, PAOK는 아리스에게 2-5로 패하였다.

클럽 창립자들과 PAOK의 단체 일원들이 마주한 홈구장 건립은 노력 끝에 1928년에 현실로 다가왔으며, 1930년 12월 12일에 신트리바니우 축구장 (Συντριβανίου Ποδόσφαιρο Στάδιο) 이 공식으로 개장했다. 이후, 아리스와 친선경기를 벌여 PAOK가 2-1 승리를 쟁취했다.

첫 프로 계약서는 역사적 의의를 지닌 문서였다. 이 문서는 클럽이 1928년 9월 5일에 서명했다. 계약 조항에 따라, 페라 클럽의 히브리아계 프랑스인 축구 선수인 레이몽 에티엔은 4,000 ₯를 월급으로 지급받게 되었다. 계약서는 멜레티누 박사, (PAOK 회장) 사켈라로풀로스 씨 (명예 비서) 가 서명하였다.[4]

1929년, AEK 테살로니키 (ΑΕΚ Θεσσαλονίκη)의 합병으로 PAOK는 문양을 변경했다. 클럽의 새 문양은 비잔티움 제국의 상징인 쌍두독수리가 포함되었고, 현재까지 사용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피난민들의 유산을 상징한다. PAOK 독수리에 드러나는 차이점은 날개를 피지 않았고, 흑색과 백색을 사용하는 것인데, 흑색은 실향의 비극에 대한 애도를, 백색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징한다.

클럽의 첫 외국인 감독은 독일인 루돌프 간저로, 1931-32 시즌에 PAOK의 감독으로 역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독일의 그리스 점령 이후, "쌍두독수리"로 알려진 팀은 1950년대 초의 역사에 한줄기 빛이 내렸다. 오스트리아인 감독이자 1931-32 시즌에 PAOK 유니폼을 입었던 빌리 제프치크 (1950-1952) 클럽에 젊은 재능들을 육성할 아카데미를 창설하였고, 팀의 위상을 상승 시켰으며, 향후 인상을 줄 인재들인 레안드로스 시메오니디스, 얀넬로스, 마르가리티스, 그리고 요르고스 하바니디스 등을 배출했다.

명성을 쌓다

[편집]

1953년은 PAOK의 황금기 개막을 알린 해다. 여름 이적 시장 기간에, 쿠이루키디스, 페트리디스, 프로요스, 게루디스, 케르마니디스, 후르불리아디스, 하시오티스, 그리고 앙겔리디스가 모두 이 시기에 팀에 합류하였다. PAOK는 전체적으로 강력한 팀으로 거듭났으며, 3년 연속으로 테살로니키 리그를 우승해 그리스 "국가" 대회에서 제2도시를 대표로 출전한 값진 팀이 되었다.

1957년, 클럽 보드진은 구 홈구장이 주 정부와 합병됨에 따라 신 축구장은 구색했다. 후보지로 선택된 곳은 툼바 구의 국방 기금 단체 소유 토지로 소아시아 피난민촌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PAOK는 총 30,000m2의 토지를 큰 가격에 매입하였고, 1959년 9월 6일, 국방 장관 G. 테멜리스에 의해 개장되었다. 첫 경기 시작 전, 공군 비행기가 상징적인 기부의 표시에서 항공로에서 공을 떨구었다. 신 구장이 생김에 따라, PAOK는 1959-60 시즌에 시작될 새 1부 리그에 참가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1959년 10월 25일, 첫 1부리그 1라운드 경기에서, PAOK는 카테리니 연고의 메가스 알산드로스를 상대로 맞이해 3-1로 이겼다. 당시 팀구성은, 세르비아인) 프로요스, 하시오티스, 라토풀로스, 얀넬로스, 케마니디스, 하바니디스, 레안드로스, 키우르치스, 쿠이루키디스, 살루스토, 그리고 니콜라이디스였다. 1950년대에 거둔 성공은 60년대의 평균적인 활약과 수반되었다. 누군가는 이 시기를 클럽의 리빌딩 시기로 보았고, 다음 10년대에 힘을 쓰기 위한 준비 단계로도 보았다.

황금기

[편집]
요르고스 쿠다스

팀은 그리스에서 축구장에서 활약했던 최고의 선수들 중 하나로 거듭났고, 선수들은 그리스 축구 현장에서 인기를 끌었다. 요르고스 판텔라키스 회장의 임기에 팀은 여러 차례 기록을 세웠다.

PAOK는 아테네 수도권 축구 강호들을 누르고 1975-76 시즌에 리그 우승을 거미쥐었고, 그 전에는 1971-72 시즌과 1973-74 시즌에 그리스 컵을 우승했었다. 1976년은 PAOK의 최대 서포터 조직인 4번 출입구가 창립된 해이기도 하다.

1974년까지, 그리스 정계는 군부가 통치했는데, PAOK는 축구계에서만 힘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반-독재적 상징을 지니고 있었으며, 툼바 경기장은 반-군부 독재 슬로건의 본산이 되었다.

한때 잉글랜드 상위 클럽들인 리버풀과 번리에서 활약했던 레스 섀넌은 PAOK를 이끌고 1971-72 시즌과 1973-74 시즌에 그리스 컵 우승으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현재까지도 그리스 축구의 영웅으로 칭송받기도 한다.

PAOK는 1980년대 초까지도 우수한 성적을 냈는데, 클럽은 꾸준히 리그 우승 경쟁팀으로 등장했다. 1984-85 시즌, 클럽은 정점을 찍었는데, 두번째 리그 우승이자, 그리스 축구 프로화 이래의 첫 우승을 달성했다. 1980년대에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판 사이에서 광신주의가 발달해, 전례 없는 규모의 훌리건이 등장한 것으로, 이들이 그리스 국경을 너머, 그리스 이주민들에 의해 유럽 전역의 도시에 팬층 생성을 촉진했다. 그러나, 팬들의 집착은 어두운 면도 부각되었는데, 소수 과격한 폭력 사태의 발생으로 구단이 징계와 벌금을 물은 것으로 드러났다.

유럽대항전에서 클럽은 역대 최고 성적을 냈는데, 1973-74 시즌, UEFA 컵위너스컵 8강까지 진출해 이탈리아 클럽 밀란에 탈락한 것이었다. PAOK는 독일 거함 바이에른 뮌헨과의 UEFA컵 1983-84 경기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는데, 팀은 두 차례의 무승부 후 승부차기에서 이겼다.[5][6]

첫 추락

[편집]
아리 한

1990년대 초에도 좋은 활약을 이어나갔는데, PAOK는 그리스 상위 세팀들 중 한팀이었다. 그러나, 토마스 불리노스 회장의 임기에 평타에서 형편 없는 팀 활약과 PAOK-파리 생제르맹 UEFA컵 이후 훌리건 폭력 사태 이후로 회장이 팬들과 다투고, UEFA 유럽대항전에서 5년간 출장 정지 징계가 내려져 재정난을 수반하게 된 계기로 클럽 역사에 오명이 씌워졌다.

부흥과 트로피 수집으로 복귀

[편집]

1996년, 팬들이 오래 기대했던 변화가 있었다. 불리노스는 회장직을 요르고스 바타투디스에게 넘겼고, 긍정의 분위기가 테살로니키 전체에 퍼졌다. 페르시 올리바레스, 지시스 브리자스, 스피로스 마란고스, 코스타스 프란체스코스와 같은 다수의 유명 선수들을 영입했고, 나머지는 새 체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1997년, 5년 징계가 끝나면서, PAOK는 팀의 전 유명 선수였던 앙겔로스 아나스타시아디스 감독의 지휘 하에 UEFA컵에 진출했다. 클럽은 유럽대항전에 복귀한 후 잉글랜드의